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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창문을 조용히 두드리다 간 밤
                                                     김경주

불을 끄고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창문을 잠시 두드리고 가는 것이었다
이 밤에 불빛이 없는 창문을
두드리게 한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에 살았던 사람은 아직 떠난 것이 아닌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문득
내가 아닌 누군가 밤에 오래 누워 있다가 간 느낌.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 듯한 느낌 또한 쓸쓸한 것이어서
짐을 들이고 정리하면서
바닥에서 발견한 새까만 손톱 발톱 조각들을
한참 만지작거리곤 하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모습으로 내가 살던 시간 앞에 와서
꿈처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방 곳곳에 남아 있는 얼룩이
그를 어룽어룽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이 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房)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 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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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내재율

Poem/poem2 2009. 10. 9. 19:24
눈 내리는 내재율
                               김경주

저물 무렵 내리는 눈은 방마다 조용히 물고 있는 마을의 불빛들을 닮아가는 군요 눈들은 한 송이 한 송이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고요한 시간마다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을 가장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 2004년 01월 26일

뚜껑이 열린 채 내려진
밥통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들의 운율이
바닥에 쌓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쥐들의 깨진 이빨 조각 같은 것이
늦은 밤 돌아와 으스스 떨며
바닥을 긁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 같은 것이
양은의 바닥에 낭자하다

제 안의 격렬한 온도를,
수천 번 더 뒤집을 수 있는
밥통의 연대기가 내게는 없다
어쩌면 송진(松津)처럼 울울울 밖으로
흘러나오던 밥물은
그래서 밥통의 오래된 내재율이 되었는지
품은 열이 말라가면,
음악은 스스로 물러간다는데
새들더 저녁이면 저처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음역으로
열을 내려 보내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 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끓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Posted by shiny_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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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옆 공중전화
                             안재융

오른쪽 볼우물에 새끼손가락을 짚고
빙긋이 웃고 있는
철기시대 전화기를 든 남자가
반가사유상의 자세로 속삭인다
전화 저쪽에서도 속삭이고 있을 듯
'No.7203-4631'유리 진열장 속
백 년도 안 된 유물이 관람자 없이
고요하게 시간 속으로 덜어가 앉는다
은행잎 화석으로 블라인드를 내린 유리창
두꺼운 인명 번호부가 쇠사슬에 묶여 있다
백 년도 살지 못할 사람들의 이름이
어떤 순서로 등재되어 긴 번호를 누르고 있는 걸까
여보세요, 남자가 자세를 바꿀 때
번호부 속 이름들이 무량으로 쏟아진다
눈썹으로 말하던 남자가 눈썹을 단정히 세우고
은빛 수화기를 공중에 걸어 놓은 전시실
청동기의 언어들이 찰칵 끊어진다
동전들이 엿들었던 이야기를 꿰고
'상평통보' '대동전' '조선통보'
동굴 같은 전화기 몸 속으로 떨어진다
슬픈 얼굴인 듯 미소 짓다가 일어서는
반가사유의 주름진 행보
전화기 저쪽도 슬픈 대답일 듯
구겨진 옷을 털며 오랜 기다림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박불관은 결부좌를 하고 언제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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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에 작은 귀

Poem/poem2 2009. 9. 27. 18:27
돌 속에 작은 귀
                        윤태진

아무도 그곳에 귀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커다란 돌이 개울 모퉁이에서
흐르는 음악을 버티고 있다
철쭉 꽃잎이 낭자한 길을 지나
물이끼가 미끈거리는 시간
나를 붙잡은 초록이 가만히 귀를 연다
버들 이파리가 돌의 내부로
햇살의 주름결을 어뜨리고
바람으로 굵어진 버들 속마다 물결은
악보를 그린다 잎맥들은 저마다의
음계를 가지고 돌 속 깊숙이
절단된 건반들을 떨어뜨리고
소리의 지층들이 푸르게
엽록소를 끌어당기고 있다
돌은 이미 돌이 아니었던 것처럼
흐르는 거울 속에 제 자신을 내려놓는다

세상의 모든 귀는 높은음자리표를 닮았다
돌의 귀에서 바람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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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치 오뎅, 오뎅 꼬치
                                   이승재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고른다
굵고 긴 것을 찾는데
굵은 것은 짧고
좀 길다 싶은 것은 죄 가늘다

친구놈은 확 꼬부라진 것을 들고 간장 종지를 찾는다
뚜껑 없는 것은 먼지가 들었을까 싫고
뚜껑 있는 것도 남의 침이 들었을까 싫다면서
그냥 씹는다

나도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 뽑아 올린다
참 많이도 뒤틀렸다
어디서나 곧은 놈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냥 간장 종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친구놈은 고장난 보일러 이야기를 한다
오래된 것이 요즈음은 계속 웅웅거리고
잔고장이 심하더니, 아예 죽어 버렸다고
계속 시위를 해도 안 되니까 아예 죽어 버렸다고
다시 살려 놓으면 실력 행사로 나올까 봐 무섭다나
터지면 죽겠지? 한다

입에서는 오뎅이 씹힌다
간장을 적시고 또 적셔도 싱거운 맛과 함께
무시당한 꿈이 씹힌다
냉골이 되었을 방과 빈 침대가
친구놈의 푸념이 쩝쩝거리며 씹힌다
아무리 입술에 힘을 주어 다물어도
점점 요란스러워진다

뒤틀리고 꼬부라진 것에 질렸는지
친구놈 담배 한 개비 불붙이고 섰다
뒤로 보이는 남산 타워와 나란히 뻐끔담배 피우고 섰다

쌓인 꼬챙이들 날 날카롭게 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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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국밥집이 붐비는 풍경
                                        고재종

담양하고도 창평장에를 가면
거기 녹슨 양철 지붕의 돼지국밥집 있다네
머릿고기, 내장, 간과 순대들
물큰내를 풍기며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다네
오일장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이른 참부터 들려
육두문자와 파만대소도 곁들이는 돼지국밥
모내기가 얼추 끝나 목 때를 벗기거나
숫눈이라도 내릴 때면 더더욱 붐비는 집
우리 동네 항우장사 이상신 씨는
주먹 송이만 한 비계까지 서걱서걱 베어 먹곤
소주병째로 털어 넣은 뒤 입 딱, 씻는다네
삼천 원짜리 국밥으론 깍두기 값도 못 건지겠다네
요즘은 인근 광주의 세단까지 웬일로 몰려와선
길바닥까지 평상 자리를 펼치자
옆집 포목점 영감, 으허으허 거쿨지게는 웃으며
구정물 퍼 묵을라고 참 많이도 온다고 외치는 집
그래도 당나귀처럼 잘도 찾아와선
비지땀 쏟으며 벌건 국물을 켜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산을 한번! 쳐다보는 집
산해진미에도 헛헛한 마음들
돼지 내장으로 씻고는 화색이 도는 것인데
아무래도 무슨 추억이며 향수를 먹는 돼지국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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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혔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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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밤나무

Poem/poem2 2009. 8. 30. 09:25
꽃이 핀 밤나무
                              류 진

그대 귀가 있던 자리에 낙엽 지는 걸 본다 그 낙엽 시들지 않아 칼날 같은 한철 끝나지 않는다 꽃 같은 그대의 귀를 베고 간 칼날, 그 칼날 몸속에 흐르므로 그대는 지금 낙엽으로 붉게 젖은 자리를 지난다 식지 않는 낙엽을 밟으며 그대는 그대를 꽃 피게 한 사랑을 미워한다 그대는 꽃이 났던 자리가 아프고 그 자리에 다시는 꽃눈 맺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그대는 스스로 비명을 듣지 못하므로 아프지 않기로 한다 몸속에 흐르는 칼날이 소용돌이 치는 날, 피지 않는 꽃과 시들지 않는 낙엽 사이에서 그대는 봄날처럼 미쳐버리고, 봄날은 찾아오지 않고, 그대의 절망 새싹처럼 깨어있다 무엇도 잠들지 않는 폐허, 같은 그대의 화원 그대는 거기서 푸른 새싹과 뜨거운 낙엽으로 나를 그린다 지금 나는 그대의 척추 같은 나무가 된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 사랑했던 자리마다 나를 세워두도록 한다 그리고 시월의 밤나무가 그러하듯이 그대가 흘린 뜨거운 낙엽 책임지지 않도록 한다 이듬해 봄이 다 오도록 굳지 않고 맥박 치는 낙엽이 있거든 나 또한 잠들지 않고 미쳐버리면 된다 미쳐서 나의 가지는 스스로를 벨 칼날이 되고 그 베인 끝자리마다 아프다는 소리 듣도록 그대 귀 닮은 꽃 새하얗게 틔우면 된다
Posted by shiny_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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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Poem/poem2 2009. 8. 28. 14:38

나무에게
                            김경주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쯤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가 울고 간 세월이 알알이
숲 속에 적혀 있는 한 우리는 또
무엇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모든 우표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연이다

허나 나무여 여름을 다 발송해 버린
그 숲에서 너는 구겨진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오래 땅 속에 잠겨 있어 보았느냐
개미떼 올라오는 사연들만 돌보지 말고
그토록 너를 뜨겁게 흔들리게 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보아라 콸콸콸 지금쯤 네 몸에서
강이 되어 풀리고 있을
저 울음의 마디들을 너도 한번
뿌리까지 잡아 당겨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굳어지기 전까지 울음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Posted by shiny_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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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천모산을 노닐다
                                -李太白

바다 사람들 삼신산 말하나 안개 물결 아득하여 참으로 가기 어렵지.
월나라 사람들 천모산 말하나 구름 노을 사이로 언뜻언뜻 볼수 있다네.
천모산 하늘에 맞닾아 비껴 있는데 기세는 오악을 뽑고 적정산을 덮을 듯.
천태산 일만 팔천 장, 동남으로 기울었다.
내 이 산 때문에 오월 땅을 꿈꾸어 하룻밤에 달빛 어린 경호를 건너려 하네.
호수의 달 내 그림자 비추며 나를 섬계로 보냈네.
사령운이 묵던 곳 지금도 남아 녹수 출렁이고 원숭이 울어댔지.
사령운의 나막신 신고 푸른 구름계단 올랐네.
산허리에 올라 바다의 일출 보니 공중에서 하늘닭의 울음소리 들리네.
수많은 바위 돌고 돌다 길 잃어 꽃에 취하고 바위에 기대니 어느덧 저물녘.
곰의 포효, 용의 울음에 온 산이 진동하고 깊은 숲 겹겹 산에 놀라 오싹하네.
구름 짙어지며 비 내리려 하고 냇물 출렁이며 안개 피어난다.
천둥소리에 번개가 번쩍번쩍 둘러싼 산봉우리 무너진다.
동굴의 돌문 우렁차게 열리네.
푸른 하늘 드넓어 끝이 없고 해와 달은 금은대를 환히 비추네.
무지개 옷 잎고 봉황 타고 구름 속의 사람들 무리지어 내려오네.
호랑이 거문고를 타고 난새가 수레를 끄는데 신선들 많기도 하지.
문득 정신 들어 놀라 일어나 길게 탄식하네.
깨어보니 침상이라 이제까지의 노을안개 모두 사라졌네.
세상의 즐거움이 모두 이러하니 예부터 모든 일은 흐르는 강물.
그대를 떠나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까?
푸른 산골짜기에 흰 사슴 놓아 명산을 찾아 타고 다닐지니.
어찌 비굴하게 허리 굽혀 권세가를 섬기며 마음 펴지 못하고 살 수 있으랴.
Posted by shiny_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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